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나라 치하 몽골 (문단 편집) == 상세 == [[몽골어족|몽골계]] 민족들은 14세기 후반 [[몽골 제국]]의 해체 이후 분열과 쇠퇴를 거듭했다. 분열 후 수많은 몽골계 종족들이 난립했으나 17세기 초중기에 한창 일어나던 [[후금]]에 [[남몽골]]이 복속되어 대원진국옥새를 바치고 후금과 일체화되었다. 17세기 말기에 강희제는 원정을 통해 준가르인들을 쫓아내 버리고 [[북몽골]]을 복속시켜 버렸다. 이때 준가르 명군인 가르단은 패퇴 후 [[알타이]] 기슭에서 자살해 버렸다. 가르단이 죽고 체왕 랍탄이 뒤를 이으며 준가르는 [[신장성]] 및 몽골 서부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겼고, 이번엔 [[티베트]]를 복속시켰다. 그 후 18세기 중기 [[건륭제]] 때에는 이 준가르를 즈려밟아 없애 (준가르인을 대량학살해)버린 뒤에 [[신장성]] 및 [[티베트]], [[칭하이성]]이 차례대로 [[청나라]] 복속되었다. 이때 [[신장성]]은 준가르 절멸로 빈 땅이 되어버렸고, 여기에 [[한족]]들과 신장 서부 타림 분지 일대에 살던 [[위구르]], [[알타이]] 일대에 살던 [[카자흐]], [[키르기스]] 등 각 [[튀르크]] 부족들을 이주시키며 둥간이라 불리는 한족 무슬림 [[후이족|회족]]도 이 지역에 들여보냈다. 북몽골의 할하인들은 [[청나라]]의 간접지배 하에 놓인 이후 끊임없이 청나라에 저항하였다. 할하 등 북몽골인은 반 독립지대로 조공국 형식이라 각 지역의 칸들이 알아서 다스리고 중국 관리는 단 한 명도 없었으나 어쨌든 청 황실에 종속되었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. 중국과는 물론 남몽골과도 이질적이었다. 이에 청나라는 [[이번원]](理藩院, Tulergi Golo-be Dasara Jurgan)이란 기구를 설립하여 만주와 남몽골 기인들에게 이번원의 모든 업무를 담당케 했다. 특히 남몽골의 차하르, 투메드, 우랑카이, 칼간 등 이미 일체화한 몽골 부족들이 할하 거주지로 들어가 이들을 통제하게 되었다. 그리고 저항하는 북몽골인들을 억제하기 위해 기존 구역을 가르고 일정한 유목지를 설정하고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기가 속한 행정구역 밖으로 이주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는 [[분할통치]](分而治之)를 시행하였다. 이 제도를 시행할 때 설정한 행정구역이 바로 호쇼트 또는 코쇼(Qosi'u)와 솜(Soum), 치굴간([[몽골 문자]]: ᠴᠢᠭᠤᠯᠭᠠᠨ, [[키릴 문자]]: Чигулган, [[로마자]]: Čiɣulɣan)이었다. 북몽골 독립 후에 당시 [[몽골인민공화국]]이 고슈트를 없애고 치굴간을 오늘날 애막([[몽골 문자]]: ᠠᠶᠢᠮᠠᠭ, [[키릴 문자]]: Аймаг, [[로마자]]: Ayimaɣ)으로 바꾼 채 [[몽골/행정구역|행정구역]]으로 쓰이고 있으며 청과 [[중화민국]] 시기를 거쳐 현대 [[중화인민공화국]]도 각각 한자로 번역해 기(旗), 소목(蘇木), 맹(盟)으로 사용하고 있다. 이는 몽골인들의 역동성과 단결성을 억제하고, 청나라의 지배구조에 순응, 동화하기 위한 조치였다. 이미 만주에 일체화된 남몽골인들은 이 기/맹 시스템을 따르고 있어서 한족들이 무슨 성 사람인가 할때 이들은 무슨 기 사람인가 라며 서로(의 출신을)를 정의했다. 청은 이질적인 북몽골인을 억제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일찍 일체화된 남몽골인들에 대해서는 이들을 우대하였다. 남몽골인들의 경우 일찍이 후금 시절부터 합류한지라 [[팔기군]]에 몽골병(蒙古兵; 몽고병) 또는 몽골팔기로, 한족으로 구성된 한병, [[만주족]]과 타 [[여진족]] 부족들 그리고 [[시버족]]으로 구성된 청병과 함께 엄연한 팔기군의 구성원이었다. 물론 숫자는 한병 즉 한군기인이 제일 많았고 [[팔기군|팔기]] 내에서 몽골기인은 상대적으로 소수였으나 이들은 한군기인보다 우대받는 집단이었고, 청대 [[남몽골]] 지역의 132기 중 106기가 [[다얀 칸]]의 후손이었는데, 황실은 주로 이들 [[보르지긴]] 왕공들의 딸과 지속적으로 통혼하였다. 덕분에 남몽골 왕공들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고, 특히 준가르 원정과 할하 복속 때 남몽골 왕공들이 주력이었기에 더욱 그랬다. 사실 남몽골이 중국화(中國化)된 원인은 이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다. 청나라 시기 남몽골에 광산 개발이 이루어지자 [[한족]]들이 남몽골에 정착하면서 남몽골이 중국에 동화돼버린 것과 한화된 만주인이 몽골인과의 혼인함으로써 한인문화가 몽골지역으로 급속히 전파된 것 등이 있다. 사실 한족들의 경우 다얀 칸 시절에 한족 거주지가 대거 몽골 영역에 포섭되자 동몽골 내 한족 비중이 갑자기 늘었고, 알탄 칸이 만든 귀화성은 아예 한족들을 동원해 만든 도시였다. 물론 남몽골의 원주민인 차하르, 우랑카이, 투메드, 칼간 부족민들은 엄연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"몽골"에 두고 있고, 오히려 [[보르지기트]] 가문의 적통임을 자부하고 있다. 북몽골의 할하 몽골인은 이 차하르인들을 아주 혐오하여 몽골인인 척 하는 중국인 정도로 취급하고, 차하르인은 보르지기트 씨족 자부심을 내세우며 자신들이 진짜 몽골 원본임을 강조한다. 허나 북몽골에도 압타이 샌 칸[* 몽골 1대 "[[젭춘담바 후툭투]]"인 자나바자르의 아버지.]처럼 칭기즈 칸의 후손이 존재했고, 청나라 시기 남몽골에서 영향력을 떨친 보르지긴 귀족들은 칭기즈 칸 직계가 아닌 그의 동생 카사르의 후손들이었다. 결과적으로 북몽골/남몽골의 분열 자체가 [[알탄 칸]] 등 몽골 왕족간의 분열 때문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정통 논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